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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우리가 잃어버린 이름, 조선의용군

우리가 잃어버린 이름, 조선의용군
  • 저자류종훈
  • 출판사가나출판사
  • 출판년2018-12-19
  • 공급사(주)북큐브네트웍스 (201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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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일투쟁의 최전선에 섰던 김원봉과 조선의용군을 찾아

    중국 현지 10,000km를 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의열단'은 그 후에 어떻게 됐을까?



    조선의용군은 의열단의 창립 멤버였던 약산 김원봉, 석정 윤세주가 주도해 만든 조선인 독립 무장 부대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식민통치의 상징이었던 조선총독부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유일한 독립투사들, 바로 그 의열단이 십수 년의 세월을 거쳐 조선의용군이란 깃발을 든 것이다.



    조선의용군은 최전선에서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르는 한편, 항일 정신을 일깨우는 선전대로서 활동하기도 하고, 소식을 듣고 찾아오는 청년들을 위한 교육과 군사훈련도 진행했다. 조선의용군이 치열하게 싸웠던 중국의 동북, 만주는 수백만의 조선인이 땅을 일구던 제2의 조선이었다. 그곳에서 조선의용군의 발자국이 찍힌 장소가 바로 우리 독립운동의 현장이다. 작가는 그들의 흔적을 모두 찾아보기로 하고, 중국 남부와 서부, 중국 공산당과 함께 싸웠던 태항산과 연연, 마지막 만주까지 10,000km를 훌쩍 넘는 길을 나섰다.



    『우리가 잃어버린 이름, 조선의용군』은 항일투쟁의 최전선에 섰던 김원봉과 조선의용군을 찾아 나선 작가의 루트를 기록한 책이다. 작가는 세월과 이념 앞에 사라진 흔적들을 찾아다니기가 쉽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그 길을 동행해 보자 권한다. 격변의 시대, 불꽃처럼 살다간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하기에.





    “이 책으로 지워져 가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움켜잡는다.

    그들을 기억하자, 기억해야 역사가 된다!” _최태성(한국사 대표 강사)

    조선의용군, 80년 만에 베일을 벗다!



    일본의 탄압과 잔악함이 점차 극에 달해가던 때, 한반도를 둘러싼 조선인 무장 대오는 크게 셋이었다. 임시정부의 광복군과 만주의 항일빨치산, 그리고 조선의용군이다. 그중 조선의용군의 대오가 가장 많았고 최전선에 있었다. 누구보다 독립을 열망했고 한목숨 던지는 데 주저함이 없던 이들이었다.



    광복군은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와 공존해야 하긴 했지만, 남쪽의 큰 줄기가 되었다. 만주의 항일빨치산들은 북쪽의 건국을 주도했다. 소련의 후원을 업은 김일성과 그 부대원들은 북한을 장악한 후, 김씨 왕조를 수립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88여단의 후손들은 지금도 북한에서 혁명 가계를 자처하며 그들만의 공화국을 버텨가고 있다.



    조선의용군만이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그들은 지워졌다. 남쪽은 그들을 빨갱이라 잊었고, 북쪽은 김일성 유일사상에 반기를 들었다며 숙청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가족은 전쟁 중에 학살당했고, 당사자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서류 한 장 찾을 수가 없다. 독립 투쟁의 최전선에 섰던 역사의 정당성도, 그 긴 세월의 대장정도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역사는 제자리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친일파의 흔적을 조금씩 지워간 대한민국은 이제 국군의 연원을 자랑스러운 광복군으로 떳떳하게 찾을 만큼이 됐다. 의용군이 창립된 지 80여 년이 흘렀다. 이제 이념의 색안경을 벗고 그들의 진짜 모습과 마주할 때가 왔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가장 최전선에서 싸웠지만

    남과 북 모두에게 지워진 이름, 김원봉과 조선의용군

    〈밀정〉, 〈암살〉, 〈미스터션샤인〉의 후예라면, 꼭 읽어야 할 책!



    영화 〈암살〉과 〈밀정〉의 흥행 이후, 김원봉에 관한 관심이 폭발했다. 백범 김구 주석의 현상금이 5만 엔일 때, 김원봉의 현상금이 8만 엔이었다는 기사도 나왔다. 현상금이 최고점에 도달했을 때는 지금 화폐 가치로 3백억이 넘는다는 설명이 떠돌았다. 일본 제국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꼭 제거해야 할 테러리스트 1호에 이름을 올린 셈이다.



    그런 그가 왜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까. 일본과 대적하기 위해 기꺼이 총을 들고 폭탄을 품고 다녔던 조선의용군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결말로 역사에 묻혔다. 조국은 분단됐고 그들은 대부분 북쪽을 택했다. 김원봉도 마찬가지였다.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남쪽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 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돼 취조를 받고 분개해 술을 마시며 삼일 밤낮을 울었다는 김원봉의 일화에서 그의 울분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된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조선의용군은 그저 중국 공산당의 일개 부대가 아니었느냐는 말을 듣곤 한다. 중국 공산당에게 이용당한 것이 아니냐는 궤변이 그럴듯하게 의용군의 실체인 양 퍼지기도 한다. 한국 전쟁 때 인민군이었다는 시선은 아직 많은 사람의 가슴 깊이 자리해 따갑기만 하다. 의용군이 창립된 지 80여 년이 흘렀지만, 이념의 벽은 때로 태항산(중국의 그랜드캐년으로 불리는 산. 조선의용군의 유적지가 가장 많이 남아있다)의 그것보다 높고 험하다. 언제 넘을 수 있을까? 언제쯤 태항산에 그럴듯한 제사상 한번 차리고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왜놈의 상관 놈들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

    _조선의용군 항일선전 구호



    중국의 ‘은두저촌’이란 작은 마을에 가면 담벼락 삼면에 우리말이 커다랗게 쓰여 있다. ‘왜놈의 상관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 오른쪽에서 왼쪽을 향해 줄 맞춘 힘찬 글자들이 도열해 있다. ‘강제병으로 끌려온 동포들이여, 팔로군 주변에 조선의용군이 있으니 하늘에 대고 총을 쏘시오.’ 네모진 한 글자 한 글자가 뚜렷하다. 정면의 글귀는 조선의용군이라는 글귀와 조사 몇몇만 남아 있었지만, 글씨를 쓴 거친 흰색 칠의 질감이 살아 있다.



    아직은 조선의용군에 대해 대중들이 쉽게 읽을 만한 기록은 턱없이 적다. 작가는 지금의 시대에서 당시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한다. 격동의 시대를 살지 않았고,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한들 그들처럼 최전선으로 달려나갈 용기가 자신에게 있을까 의심되지만, 사관의 역할쯤은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책을 냈다고 얘기한다. 지금도 조선의용군을 기리는 작업은 누군가에 의해 계속 얹어가고 있다. 더 많은 관심으로 이어져 그들이 우리 역사에서 제자리를 찾는 날이 속히 오기를, 후대의 한 사람으로서 바라본다.







    추천사



    “암흑과도 같은 시절, 희망의 불빛 한 줄 부여잡기 위해 대륙의 대장정을 마다치 않았던 조선 청춘들의 발자취가 보이기 시작한다. 잊혀 가고 있었던 그 청춘들의 뜨거운 조국 해방의 함성이 들리기 시작한다. 지워져 가고 있었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다시 움켜잡으며 우리의 역사였다고 선명하게 쓰기 시작한다. 이제 이 책을 통해 그 청춘들을 만나러 함께 떠나 보자. 그리고 ‘조선의용군’을 기억하자. 기억해야 역사가 되기에….”

    _최태성(한국사 대표강사)









    본문 내용 발췌



    일제가 조선인들을 핍박할 때 의열단도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의열단은 조선 총독과 관료들, 친일파, 밀정을 암살 대상으로 정했고, 총독부와 식민 통치를 미화하는 언론기관, 각 경찰서를 파괴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실제로 행동했다. 조선 총독부, 종로경찰서,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제 식민 통치를 뒷받침하던 핵심

    기관들에 폭탄을 던지고, 추격하는 경찰들과 총격전을 마다치 않았다. 나석주, 김상옥 열사 등의 이름을 교과서에서 배운 기억이 날 것이다. 이 의열단의 노선과 행동강령을 적은 문건이 단재 신채호 선생의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라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의열단은 그 후에 어떻게 됐을까?

    _ 〈프롤로그〉 중에서



    독립 투쟁을 하던 어느 민족도 혹독한 식민통치하에서 우리처럼 질기게 군사 훈련을 지속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다. 나라는 잃었지만, 항일 무장투쟁의 전통은 일관되게 유지됐다. 만주에서, 대륙의 천년고도에서 조선 사람들은 독립운동의 끈을 놓지 않고 다가올 전쟁을 예비하고 있었다. 여러 곳의 군관학교에서 우리 말을 쓰며 훈련받고, 우리의 독립을 준비했다. 때론 실전이 오갔고, 항상 실전을 준비하는 훈련에 매진했다. 그들에게서 훗날의 한국 광복군이 나왔고 대륙을 누빈 조선의용군을 얻었다.

    _ 〈03. 대륙의 군사 엘리트들과 훈련하다〉 중에서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유관순에 버금가는 여성 독립 운동가였다. 그 자신이 의열단원이기도 했고, 남경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가 만들어졌을 때 교관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조선에서 자란 소년들이여. 가슴이 피 용솟음치는 동포여. 울어도 소용없는 눈물 거두고 결의를 굳게 하여 모두 일어서라. 한을 지우고 성스러운 싸움으로 필승의 의기가 여기에서 뛴다.” 전장을 누비는 건장한 남성이 남겼을 법한 이 말의 주인공이 박차정이다.

    _ 〈04. 성별, 신분을 넘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뭉치다〉 중에서



    중경으로 본부를 옮긴 김원봉의 머리는 복잡했다. 의용군의 향후 행로를 결정해야 했다. 중국은 자신들이 관리하는 선전부대로서 의용군이 활약해주기를 원했다. 국제적인 연대를 과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했으나 통제를 벗어나는 전투부대로 육성하는 것은 꺼렸다. 하지만 대원들은 매일 밤 총을 들고 전선을 누비는 꿈을 꾸며 잠들었다. 군인은 전장에 있어야 한다. 누적된 불만은 언제 터질지 모를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의열단 시절부터 김원봉이 가장 신뢰하던 석정 윤세주마저 의용군을 전선으로 옮길 것을 주장했다. 전선은 황하를 넘어 화북을 말했다.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일제와 교전하고 있던 곳은 동북 만주였지만 너무 멀었다. 하지만 화북 태항산을 중심으로 뻗은 전선에서도 모택동의 팔로군과 일본 황군의 전투는 치열했다. 의용군대원들이 바라는 전장이었다. 더구나 화북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숫자는 20만 명을 넘어섰다. 그들에게 의용군을 알리는 일도 중요했다.

    _ 〈08. 조선의용군의 미래를 결정할 기로에 서다〉 중에서



    조선의용군은 창립 초기부터 교육을 중시했다. 정규 군사교육을 받기 위해 국민당과 끈질기게 교섭했고, 어디든 부대 주둔지를 정비하면 교육 훈련 계획부터 세웠다. 실력이 있어야 독립 투쟁도, 전투도 할 수 있었다. 전투가 계속되면서 연안, 산동, 화중을 비롯한 넓은 지역 곳곳에 의용군의 교육기관을 세우려고 시도했다. 그 배움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는 곳이 중원촌(中原村, 쭝위엔춘)이다

    _ 〈12. 합류하는 조선청년들을 위해 교육에 매진하다〉 중에서



    호가장 전투는 조선의용군에게 일대 전환이었다. 수천이 전사한 전투도 아니고 수십만이 학살당한 전투도 아니었지만, 호가장 전투는 중국 민중과 팔로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목숨을 걸고 의용군과 팔로군 주력의 길을 터주던 대원들의 헌신이 입에서 입으로 회자됐다. 의용군의 이름이 각인되기 시작했다. 실전을 예비하고 끊임없이 군사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원들의 자질이 우수했던 터라 실전에서 물러서거나 움츠리는 일도 적었다.

    _ 〈13.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호가장 전투〉 중에서



    전선에서는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의용군의 상황도 비슷했다. 전쟁은 길었고 보급은 중요했다. 먹고 입고 쓰는 문제는 당장의 전투처럼 빛은 나지 않지만 어쩌면 총을 드는 일보다 더한 무게가 있는 일이었다.

    _ 〈21. 전쟁은 길었고 보급은 중요했다〉 중에서



    사실 의용군의 연안 이동에는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 의용군이 비록 공산당과 함께 싸우고는 있었지만, 시작은 약산 김원봉이었다. 김원봉은 중경 임시정부에 있었고, 국민당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북상해 공산당 팔로군과 싸우고 있는 의용군 대원 중에는 공산당원도 있었지만, 김원봉과 같은 성향이 있는 대원들도 상당수였다. 태항산에서 전사한 석정 윤세주가 대표적이었다. 처음 의용군이 공산당 근거지로 북상해 일본군과 교전하면서도 임시정부를 구심점으로 여긴 것이 의용군의 정치적인 성격을 증명한다.

    _ 〈23. 김원봉, 임시정부와 멀어지다〉 중에서



    그토록 바라던 해방 조국에 왔는데 설 자리가 없어 다시 강을 넘어야 했다. 역사는 때로는 아무 보답이 없다. 그들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도망치면서 북한에서 의용군은 금기어가 됐다. 애초 남쪽에서는 더했다. 의용군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의 주력이었으니 말할 필요가 없다. 의용군은 남북에서 모두 그 공이 지워졌다. 의용군 창설 80년, 광복 70년이 지났지만, 누구도 쉽게 기릴 수 없는 역사가 되었다.

    _ 〈24. 일생을 독립에 몸바친 투사들의 안타까운 최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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